by 이작가 · 하이 판타지 · 19화
목차
1. 프롤로그 - 잊혀진 예언 2. 1장 - 변방의 소년 3. 2장 - 붉은 달의 밤 4. 3장 - 은빛 탑으로 가는 길 5. 4장 - 잊혀진 길 6. 5장 - 어머니의 마지막 7. 6장 - 은빛 탑 8. 7장 - 다섯 날의 시험 9. 8장 - 형제의 얼굴 10. 9장 - 일곱 번째 왕좌 11. 에필로그 - 대장간의 불 12. 간주 1 - 천 년 전의 밤 13. 간주 2 - 보르의 화로 14. 간주 3 - 엘리아나의 추방 15. 간주 4 - 미라엘의 첫 순례 16. 간주 5 - 침묵의 기사단의 기원 17. 외전 1 - 동방의 돌 18. 외전 2 - 미라엘의 다음 길 19. 외전 3 - 한바르의 기록프롤로그 — 잊혀진 예언
북방의 겨울은 언어를 얼린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혀끝에서 흘러나온 말이 입술을 벗어나기도 전에 얼어붙어, 결국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스스로조차 잊게 된다고. 그래서 북방 사람들은 입을 닫고 살았다. 말 대신 눈빛을 읽고, 말 대신 손짓을 주고받으며, 말 대신 침묵 속에 뜻을 묻었다. 침묵은 북방의 모국어였다.
그날 밤의 하늘은 평소보다 더 낮았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별빛이 스며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장막을 내려 북방 전체를 덮어버린 듯, 빙원 위에는 오직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 바람조차 낯설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동쪽에서 다시 서쪽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케이른 마을의 늙은 대장장이 보르는 그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오십 년 넘게 이 마을에서 살아온 그는 바람이 이렇게 우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로의 불씨는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방 안은 이상하게 밝았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것은 달빛이 아니었다. 달빛은 차갑게 푸르지만, 지금 흘러드는 빛은 희미하게 붉었다. 핏물을 희석한 것 같은, 그러나 핏물보다는 오래된 빛. 보르는 자신이 젊었을 적에 단 한 번 그 빛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붉은 달이 뜨는 밤은 예언이 되살아나는 밤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의 관절이 끼익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조차 바람에 묻혔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다. 마을은 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오직 마을 어귀의 고목 한 그루만이 붉은 달빛을 받아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그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아이였다.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흰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소년이 맨발로 눈 위에 서 있었다. 아이의 발아래에서 눈이 녹고 있었다. 녹은 물이 다시 얼어붙어 소년의 발을 받치고 있었다. 보르는 숨을 삼켰다. 아이의 눈은 뜨여 있었으나 이 세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동공은 텅 비어 있었고, 입술은 천천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보르가 다가가자, 그 속삭임이 귀에 닿았다.
"북방의 아들이 남방의 딸을 만나는 날, 얼음의 심장이 깨어날 것이다. 일곱 개의 탑이 무너지고, 일곱 개의 이름이 잊혀지고, 일곱 번의 밤이 낮보다 밝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잊혀진 왕좌가 다시 호흡할 것이다."
소년의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가, 쇠를 긁는 짐승의 소리였다가, 물속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보르는 그 목소리를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화롯가에서 들려주던 옛 노래. 신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갔다는 그 노래. 어른들이 그것을 "잊혀진 예언"이라 불렀고, 잊혀졌기 때문에 다시는 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일곱 살 아이의 입을 빌려, 예언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보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 작은 어깨를 흔들었다. 아이의 살결은 얼음장이었다. 사람의 체온이라 할 수 없었다.
"얘야, 얘야. 정신 차려라."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비었던 동공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소년은 보르를 올려다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번에는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꿈을 꿨어요. 아주 긴 꿈이었어요. 그 꿈 속에서 제가 어른이었고, 손에는 검이 있었고, 제 앞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전부 죽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전부 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보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이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를. 삼 년 전, 한 낯선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이 마을에 찾아왔을 때, 그녀는 오직 한 가지만을 부탁했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평범한 이름으로 살게 해달라고. 왜냐하면, 그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진짜 이름은 예언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예언이 호명되는 순간, 세상은 그 아이를 찾아내고 만다고.
여인의 이름은 엘리아나였다. 은빛 탑에서 추방당한 대마법사. 북방까지 쫓겨 와 자신의 이름마저 숨기고 살아야 했던 여자. 그녀는 아이를 맡기고 사라졌고, 그 후로 마을에서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보르는 오늘 밤, 이 붉은 달 아래, 이 고목 옆에서, 그녀가 숨기려 했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카엘. 북방의 오래된 말로 "잊혀진 자"라는 뜻.
바람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방향이 또렷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르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남쪽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탄 자의 횃불이었다. 아직은 멀었지만,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의 불빛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케이른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이 아이를 향해.
보르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얼음 같은 그 손을. 그리고 자신의 투박한 손바닥으로 그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대장장이의 손. 오십 년 동안 쇠를 다룬 손. 쇠보다 단단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믿어온 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쇠보다 단단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었다.
"카엘아."
그는 오래도록 불러서는 안 되었던 이름을 불렀다.
"집으로 가자. 지금 당장."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기 전에 얼어붙었고, 얼어붙은 그 결정체 속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고대 신들이 남긴 룬의 빛이었다. 성흔 마법의 첫 번째 각성이었다.
그리고 남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이 마을에 닿았다.
잊혀진 예언이 깨어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