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작가 · 하이 판타지 · 19화
목차
1. 프롤로그 - 잊혀진 예언 2. 1장 - 변방의 소년 3. 2장 - 붉은 달의 밤 4. 3장 - 은빛 탑으로 가는 길 5. 4장 - 잊혀진 길 6. 5장 - 어머니의 마지막 7. 6장 - 은빛 탑 8. 7장 - 다섯 날의 시험 9. 8장 - 형제의 얼굴 10. 9장 - 일곱 번째 왕좌 11. 에필로그 - 대장간의 불 12. 간주 1 - 천 년 전의 밤 13. 간주 2 - 보르의 화로 14. 간주 3 - 엘리아나의 추방 15. 간주 4 - 미라엘의 첫 순례 16. 간주 5 - 침묵의 기사단의 기원 17. 외전 1 - 동방의 돌 18. 외전 2 - 미라엘의 다음 길 19. 외전 3 - 한바르의 기록7장 — 다섯 날의 시험
첫째 날, 카엘은 침묵을 배웠다.
어둠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호흡 소리만을 들었다. 처음 몇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가득했다. 보르의 얼굴. 대장간이 무너지던 소리. 어머니가 건넨 나침반. 미라엘의 푸른 눈 짐승. 잊혀진 길에서 그를 불렀던 보르의 목소리. 엘리아나가 돌 원 위에서 사라지는 장면. 그는 그 장면을 본 적이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그의 마음 속에 그것이 그려졌다. 마치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바람을 타고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그는 그 생각들을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가게 두었다.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다음 생각이 그 뒤를 이어 지나갔다. 그는 생각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관찰하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생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은 생각을 보는 자였다. 생각 뒤에 있는 어떤 고요한 응시자였다. 그리고 그 응시자는, 생각들이 지나가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다고 그가 느꼈을 때, 문이 열렸다. 바깥에는 세라누스가 서 있었다.
"너는 침묵을 배웠다. 훌륭하다. 대부분의 제자는 사흘이 걸린다."
둘째 날의 방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모두 흰빛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세라누스는 카엘에게 그 의자에 앉으라 했다.
"둘째 날, 너는 말을 배운다. 말이라고 해서 단어를 암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너는 이미 단어를 안다. 너는 오늘, 말이 무엇인지 배운다. 말은 소리가 아니다. 말은 약속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일부를 건네는 약속. 말을 할 때 너는 무언가를 잃는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를 얻는다. 오늘 너는 너의 가장 깊은 비밀 한 가지를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이 방에서, 너 자신에게. 그러면 너는 그 비밀을 평생 다시는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다."
카엘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이 무엇인지 몰랐다. 성흔? 그것은 이미 아는 자들에게는 비밀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정체? 그것도 이제는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한 뒤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보르 할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돌아가시던 날 저는 어머니보다 그를 더 그리워했습니다. 저는 제 어머니를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말이 저에게는 낯설었고, 보르 할아버지의 투박한 손이 제게는 유일한 온기였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미안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방에서, 저는 그것을 말합니다. 저에게 진짜 아버지는 보르 할아버지였다고."
그 말을 하는 순간, 카엘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가볍게 풀렸다. 십칠 년 동안 그가 자신도 모르게 짊어지고 있던 어떤 무게가, 이 방의 흰 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는 울지 않았다. 다만 그의 호흡이 한 번 깊어졌다.
문이 열렸다. 세라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말을 배웠다."
셋째 날의 방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발목까지 차오른 물이었다. 물은 투명했으나 차갑지 않았다. 물 위로는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셋째 날, 너는 망각을 배운다. 이 방의 물에 네 손을 담그고, 네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원한 한 가지를 물에게 주어라. 그 원한은 이 물이 대신 기억할 것이다. 너는 잊을 자유를 얻는다."
카엘은 자신에게 원한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는 북방의 소년이었고, 원한보다는 인내를 먼저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물에 손을 담그는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하나의 원한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자신을 낳았으면서 자신을 키우지 않은 어머니. 자신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어머니. 그래서 자신이 십칠 년 동안 이름 없는 자처럼 살아가게 만든 어머니. 카엘은 그 원망을 인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원망 때문에 그는 어머니를 만난 순간에도 진심으로 포옹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만 끄덕였고, 고개만 숙였고, 고개만 돌렸을 뿐이다.
그는 물속에 그 원망을 놓아주었다. 물은 그것을 받았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파동 하나가 퍼져나가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카엘은 처음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원망이 사라지자 그리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이 탑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북방의 얼어붙은 눈물이 아니라, 따뜻한 눈물이었다.
"너는 망각을 배웠다."
세라누스의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렸다.
넷째 날의 방은 거대한 거울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방 벽이 모두 거울이었고, 그 거울들은 서로를 반사하고 있었다. 카엘이 방 안에 서자, 수천 명의 카엘이 그를 둘러쌌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들 모두가 같은 카엘이 아니었다. 어떤 카엘은 열 살이었고, 어떤 카엘은 서른 살이었고, 어떤 카엘은 백 살이 넘어 보였다. 어떤 카엘은 왕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어떤 카엘은 거지의 누더기를 입고 있었고, 어떤 카엘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넷째 날, 너는 기억을 배운다."
세라누스의 목소리가 거울 뒤에서 울렸다.
"너는 일곱 번째 왕좌의 계승자다. 그 말은, 천 년 전 호명되지 못한 왕좌의 모든 가능성을 네가 품고 있다는 뜻이다. 네가 될 수 있었던 모든 카엘, 네가 될 수 있는 모든 카엘이 이 방 안에 있다. 너는 오늘, 그중 단 한 명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 한 명이 너의 진짜 이름이 될 것이다. 나머지는 다시 왕좌의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카엘은 거울 속의 수천 명을 응시했다. 왕의 복장을 한 카엘은 화려하고 위엄 있었으나, 그 눈에는 외로움이 있었다. 거지의 누더기를 입은 카엘은 초라했으나, 그 눈에는 자유가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카엘은 강해 보였으나, 그 눈에는 후회가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한 명의 카엘을 발견했다. 거울의 가장 구석에,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카엘. 그 카엘은 북방의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등에 성흔이 빛나고 있었으나,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외로움도, 자유도, 후회도 없었다. 다만 고요한 결심만이 있었다.
카엘은 그 카엘을 선택했다.
그 순간 다른 모든 카엘들이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고, 그 입자들은 카엘의 선택받은 모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이, 이 하나의 선택 속에 압축되었다. 카엘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너는 기억을 배웠다."
세라누스가 말했다.
"이제 다섯째 날이다."
다섯째 날의 방은 없었다.
카엘이 넷째 날의 거울 방을 나섰을 때, 그의 앞에는 긴 복도 하나뿐이었다. 그 복도의 끝에는 문이 없었다. 그 대신 공간 자체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공간 너머에,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어둠도 아니고, 가득 찬 빛도 아닌. 아무것도 없다는 상태 그 자체가 그 너머에 있었다.
"저것이 왕좌입니까."
카엘이 물었다.
세라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왕좌가 있어야 할 자리다. 천 년 전 왕좌가 사라진 바로 그 공간. 그곳은 아직 비어 있다. 네가 걸어가서, 네 자신을 그 빈 자리에 놓아야 한다. 너의 이름과, 너의 기억과, 너의 선택을. 그러면 왕좌는 너를 통해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
카엘은 복도의 입구에 섰다. 그의 왼손등에서 성흔이 이제 뜨겁지 않았다. 뜨거움을 지나 고요함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복도의 끝의 그 텅 빈 공간에서, 한 사람의 형상이 천천히 나타났다. 카엘은 그 형상을 알아보았다.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얼굴은 거의 카엘 자신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나이가 훨씬 많았을 뿐. 이마의 선, 코의 모양, 턱의 각도. 모든 것이 거울 속의 자신과 같았다.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한없이 부드러웠다. 엘리아나가 경고했던 바로 그 부드러움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나의 동생아."
침묵의 기사단의 주인이, 카엘 앞에 나타나 있었다.